• Mermaid In Wonderland - 1/2
  • 2018. 11. 2. 10:19

  •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해마라고 소개했다.


    "음. 저… 먼저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아. 물론이죠. 한번 쯤은 본 적 있으실텐데, 해마라고 해요. 영어 이름은 우리 나라 명칭과 똑같이 Sea horse구요. 학명은 Hippocampus coronatus며 실고기목 실고기과로, 크기는 6cm 에서 10cm정도…"

    "…저기."

    "네?"

    "…해마말고 그 쪽이요."

    "…아."

    "………."

    "………."






    Mermaid In Wonderland







    고등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수능 참패를 등에 업고, 인간 전진은 난데없이 세상에 '무소속 출마'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한마디로 겁 없는 똥강아지 였던 난 그게 너무 두려워져서, 부모님의 빗발같은 반대를 뚫고 재수를 했다.

    예상치 못한 비용의 발생으로(여기서 예상치 못한 비용이란 재수 비용이 아닌 대학 입학금을 뜻한다. 네가 대학에 가겠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또 등록금은 내 알바 아니라고도.)집에서 쫓겨나 자취방을 구해야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밤 늦게까지 고여있던 고등학교가 조금 그리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결코. 네버.

    그 때 기적과도 같은 고등학교 선배인 형의 연락, 구원과도 같은 형의 주선으로 내가 다니게 될 대학 근처에 산다는 사람을 알게되었다. 대학 선배인데다 마침 룸메이트를 구하기까지! 형을 사이에 두고 몇번인가의 전달이 있은 뒤, 사실상 들어가기로 결정되었지만 어느 날 눈 떠보니 같은 지붕 아래. 는 난감하다고 생각되어, 소개도 받고 가격도 의논할 겸 만나기로 했다.


     

    면접 볼 때 다듬고 방치해뒀더니 갈 길 잃은 머리도 정리했다.

    졸업식 이후 곰팡이 배양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던 정장도 빼입었다.

    애쓴 티 팍팍나는 신출내기 대학생 흉내는 취미없다, 이 말씀이야.

    …정장은 좀 아닌가?


    그렇게 현관에 걸려있는 거울 앞에 서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안녕히, 어머니 아버지.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뭐.


    "아들 나가요!"

    "또 옆길로 새지 말고 집으로 곧장 들어와라."

    "아, 아부지도 참, 내가 뭐 앤가? 언제 들어올지는 내가 정해요."

    "안 들어올거면 마라. 벌써 계약까지 다 마쳤냐? "

    "…다녀올게요."

     

    그 다시 만날 날은 오늘쯤.




    2월의 바람은 아직 차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버스는 코빼기도 안보인다.

    달리 할 일이 없어 단조로운 차들의 행렬을 응시해 보았지만, 곧 무료해졌다. 시선을 아래로 돌려 신발 밑창을 여기저기 비비적거리는데, …뭔가. 방금 뭔가가. 무심코 닿아오는 감각에 머릿속에 불이 밝았다. 그 생경함의 숙주는 밑창 아닌 신발코였다.

    이번에는 발을 지구와 직각으로 꽂고, 들어올렸다가, 연달아 낙하시켰다. 툭툭. 두드리자 마치 도로시가 된 듯한 기분이 되었다.

    토토야, 어디있니? 놀라서 안 나올 만도 해. 내가 도로시하기엔 또 장신이지, 훗.


    훗-의 꼬리를 물듯 버스가 내 앞에 섰다. 며칠 뒤면 정류장도 번호도 바뀔 낯익은 버스에 올라탔다. 운전기사는 포악하기로 소문난 뽀글머리 아저씨였다. 방학이라서 들을 수 없는 아저씨의 학생들 안으로 좀 들어가!!!하는 지겨운 고함소리가, 그래서 조금은 정겹게 느껴졌지만, 물론 다시 듣고 싶지는 않았다.

    전혀 실감할 수 없는 히터기의 바람과, 부대끼는 옷깃, 그리고 버스의 고동소리. 다시는 같지 않을테지. 오늘은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다. 괜히 센치해진 와중에도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진동이 울린다. 액정에 뜨는 세글자 [구원자]. 선배다.


    "어, 형. 지금 가고있는 중이야."

    --진아, 미안한데 내가 약속이 생겨서 못 나가게 됐다. 나 없이도 괜찮겠어?

    "아아 물론이지. 뭐 급한 일이야?"

    --실은 선약이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어. 좀 더 빨리 전화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아니야. 그건 그렇고 진짜로 고마워 형. 내가 언제 술 한번 살게."

    --입학 통지 받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술이냐. 하긴 넌 이미 나를 넘어섰지.


    크크. 하는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럼 가서 안부 전해주고. …무슨 일 생겨도 당황하지 말고.


    형의 목소리 앞에 탁탁 찍히는 침묵이 다소 신경쓰였지만, 버스가 목적지에 멈추자마자 내 사고도 그대로 스탑.



    형과도 몇번인가 들린 적이 있는 전면이 창으로 된 카페에 도착했다. 마지막 점검 실시.

    약속 시간 1분 전, 이정도면 적당하고. 외모는 뭐, 지나치게 준수하고. 이거 무슨 미팅이라도 하는 것 처럼 가슴이 뛴다. 다만 그 상대가 남자일 뿐.

    [맨 구석자리의 노란 후드티.] 미래의 룸메이트에 대한 형의 마지막 전언이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노란 후드티. 상반되는 느낌. 지금 내 상태는 설레임 반, 두근거림 반, 한마디로 심장박동 최고속도다.


    '나 없이도 괜찮겠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

    물론이다. 밥 한끼 같이 먹으면 친구가 된다는 남고에서 자라난 전진, 다른 건 몰라도, 아 술 마시는 건 빼고, 사람 사귀는 거 하난 자신있다니까.


    드디어 문을 열고 들어서, 휘휘 둘러보자 그야말로 샛노란 빛깔이 두 눈 가득 차오른다. 다가가 활기차게 인사를 건내고, 밥 한 끼 먹고, 대학 선후배로서 정다운 이야기들을 나눌것이다! 나눈다! 나눴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

    "…저."


    노란 후드티의 사내는 테이블 위에 책 한 권 올려놓고 열심히 정독 중. 내가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도 대꾸가 없다. 수업시간에 교과서로 위장한 만화책을 읽는 것 처럼 어깨까지 한껏 구부린채로 묵묵부답. 손목에 다다라 좁아진 소매 밖으로 나와있는 손은, 남자치곤 꽤 작았다. 무엇에 그리 빠져있나 싶어 흘끗 넘겨보니, 사진과 함께 글씨가 빽빽히 들어차있…는데 저건… 해마?

    룸메이트 소개 받는 자리에서 해마…를 들여다보고 있다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질 기미는 없고,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안녕하세요! 아닌 프시식, 하는 작은 웃음소리는 들렸는지 노란 덩어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찬찬히. 이윽고 책 위로 드러난 두 눈은…

    헉.


    "토토?"

    "네?"

    "아. 아니…"


    순간적으로 머리속을 뚫고 지나간 이미지는, 어이없게도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의 개 토토였다.

    설명은 필요없어요. 물기 있는 눈이 그렇게 이야기 한다. 대신 입은 꾹 다물어진 채 침묵. 토토의 참극을 딛고, 다시 한번 전진.


    "그러니까 룸메이트 구하시는…."


    끄덕. 눈동자의 물기가 일렁인다.


    "………."


    그러고보니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저쪽도 마찬가지 일테니까 상관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네? 하는 목소리… 깊었다.



    마주치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된 그의 눈길은, 일단 수신자를 찾고 나자 깜빡일 때를 제외하고는 빈틈없이 나를 향했다. 눈길과 눈길 말고는 그 무엇도 소통하지 않는 채로 꽤 시간이 흘렀다. 그는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도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서 그가 눈을 감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참은 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야- 숨통이 막혀 나오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져 나왔다.


    "음. 저… 먼저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아. 물론이죠."


    지금까지의 보편적이지 못한 침묵은 없었던 것 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한번 쯤은 본 적 있으실텐데, 해마라고 해요. 영어 이름은 우리 나라 명칭과 똑같이 Sea horse구요. 학명은 Hippocampus coronatus며 실고기목 실고기과로, 크기는 6cm 에서 10cm정도…"


    …운을 뗄 때 까지만 자연스러웠다.

    "…저기."

    "네?"


    다시 한번, 그러나 히터기의 바람, 부대끼는 옷깃, 버스의 고동소리처럼 다시는 같지 않을 그의 '네?'.


    "…해마말고 그 쪽이요."

    "…아."

    "………."

    "………."


    잠깐의 침묵. 곧이어 와하하,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 없었다. 나지막하게 웃던 그가 덧붙여(제대로 말한 것이 있다면) 말했다.


    나는…




    "동완. 김동완."




    * * * * * 




    "만나자마자 당황했어. 형."


    잠깐, 화장실 좀. 고개를 끄떡이는 그를 뒤로하고 어색하게 일어나, 화장실에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갑작스런 말에도 의아해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선배는 하하하 웃으며, 당황했지?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야, 그 녀석. 하고 대꾸했다.


    --이번에는 뭐라고 소개하든?

    "응?"

    --나 때는 오징어였거든.


    오늘은 해마였어. 그러냐? 하하하.



    자리에 돌아와서 앉으니 꾸벅, 하고 인사를 해온다. Sea horse씨는 -학명은 듣는 순간 자체 생략- 자신을 해마라고 소개하거나, 소리 없이 웃거나, 아무 말 않거나, 내 눈을 바라보거나 하다가 '나는 동완. 김동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동완. 어감이 참 좋네요. 는 왠지 낯간지러워 속으로 삼키고,


    "저는 전진이에요. 성은 전이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야심차게 이름을 소개했다. 나는 내심 네에에? 그럼 이름이 전전진이라구요? 하하하! 혹은 위트 있으시네요. 그것도 아니면 즐거운 웃음.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아. 네."


    안 웃겨? 이게? 돌아온 반응은 절망적이다 못해 허탈했다. 마실 마음이 없었는지 아니면 내가 도착하면 시키려고 했는지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리세 정도의 음료를 주문했다.


    구부정. 깔짝깔짝. 지긋이. 쪽쪽쪽. 펄럭. 쪽쪽쪽.

    그는 나조차 불편해지는 듯한 자세로 책을 읽으면서 손톱으로 테이블을 갉작이고, 처음보단 빈도가 덜해졌지만 여전히 내게 눈을 맞추다가, 음료수 몇 입 빨아마시고. 책장 넘기고. 다시 쪽쪽쪽.


    "무슨 책 읽어요?"


    대답없이 책을 들어보인다.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해양생물학. 왠지 입안이 텁텁해지는 기분이다. 농구 입문서 <농구>, 만화 그리는 방법을 도구 선택에서 원고 작성에 이르기까지 친절히 기술하고 있는 <만화 그리기 - 기초>, 공동체 의식 함양 및 자아 정체성의 형성 등의 무한반복으로 점철되는 도덕과 교과서의 제목 <도덕>. 과 다를 바 없는, 지독히 재미없는 제목의 책이었다. 취미로 읽을 만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물었다.


    "음. 제가 이번에 입학할 대학에 다니신다면서요. 선배님이시네요. 헤헤. 무슨 과 다니세요?"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책을 직각에 가깝게 세우더니 제목을 톡톡 두드린다. …해양생물학.

    솔직히 말해서, 처음 들어봤다. 그만큼 생소했지만 생소함과 비등한 정도로 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열대어 같은 색상의 옷차림, 아니면 심해를 먹고 자란 눈동자 때문에. 신기한 마음에 거길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나 물으니


    "양식업."


    힉?


    "또 여러가지 해양 관련 공무원이나 연구원이 될 수도 있고. 중등학교 정교사도 가능하고요."


    눈 하나 깜빡안하고 양식업. 이란다. 이 사람, 어쩌면 나보다 고단수 일지도 몰라. 이것이 말로만 듣던 위트가이란 말인가. 전전진에 자만했던 내가 어리석었어.


    "으음. 실례가 아니라면, 그럼 형은 어떤 직업?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작게 끄덕이고 작지만 명료하게 대답한다.


    "아쿠아리스트."

    "…………."


    그러고보면 대화를 끊어먹을 소지를 주는 건 번번히 나란 말이지. 아쿠아 리스트?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아쿠아? 아쿠아리움?


    "왜 있잖아요, 아쿠아리움에서. 수족관 속을 헤엄쳐 다니며 안녕- 손 흔들어주는."

    "와와. 그거잖아. 인어! 아쿠아리스트는 그것만 하는거에요?"


    웃는다. 인어라는 말 때문인가. 어느새 처음의 그 일자 입은 봉인 해제 되어있다. 이를 거진 다 내보이며 상하좌우로 크게 벌어지는데, 소리는 없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호쾌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마치 이미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의 입이다. 입에도 표정이 있구나. 왠지 감격스러운 기분인데.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니까 반은 맞았다. 원래 시작이 반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끝까지 잘못 가기 마련. 말할 꺼리가 생겨 기쁜 마음에 계속하여 재잘재잘 물어보았다. 불필요한 여분의 말은 없지만 제법 성의있는 답변이 되돌아오고, 신나서 또 물어보고, 또 궁금해지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수족관 청소도 하고, 애기들 데려오고, 먹이도 주고, 키우고,"

    "보기보다 복잡한데. 근데 애기라면?"

    "말 그대로 키워야 할 친구들. 상어나 피라니아나 거북이나"


    요상해지는 내 표정을 살펴보다가 씨익. 쏟아진다, 웃음.


    "또 뭐 해마라던가."




    음료수도 바닥나고 마음도 입도 풀렸을 즈음, 같이 밥먹을래요? 물었지만 배불러요, 다음에. 상냥한 거절의 말이 돌아온다. 다음에. 으으으음. 가슴이 뻐근해진다. 간지럽기도 한 이….

    여기. 네? 번호 찍어주세요. 그럼 내 것도.

    내 것을 받아들며 그가 휴대폰을 내민다. 까만색 조그마한 슬라이드 형이다. 보호케이스도 액정필름도 없다. 엄지손가락으로 괜히 액정을 스윽 문지르고, 꾹꾹 꾸욱. 자판이 작아서 번호를 찍는데 약간 애를 먹었다.


    "이거."


    그의 손끝에서 찍혀져 나온 생소한 숫자들에 붙일 이름을 고심한다. 해마? 김해마? 김동완. 동완형. …토토.


    "뭐라고 저장했어요?"

    "음?"


    이름란에 토토라고 쓰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가 혹시 볼까 싶어 액정을 손바닥으로 가리는데 그는 이미 저장을 끝내고 휴대폰을 집어넣고 있다. 그는 음? 하며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지가 궁금하다는 눈치였지만 친절하게도 전화번호부에서 내 것을 찾아 건내준다. 잠깐동안의 망설임도 없다니, 대체 뭐라고 저장했길래?


    [전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생일이 언제에요?"

    "…11월 21일."


    1121. 숫자를 머리 속에 양각 새기듯 새겨넣으며, 문득 생각했다. 다음 11월까지는 1년 가까이 남았다. 그 때까지 지속될 인연일지, 끊어지지 않더라도 아아 생일이구나. 하고 말 사이가 될지. 아직은 모든 것이 미지수다.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야, 그 녀석.] 응. 그런 것 같아, 형.


    나는 그를 바라보며,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다는 생각과 수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연락해도 되죠?"


    끄덕 끄덕.


    "말 놔도 되요."

    "…응."


    어느 쪽으로 가요? 이쪽으로. 어, 반대편이네. 그럼 연락할게요. 그러고보니 언제 들어갈지도 결정안했고. 끄덕 끄덕.




    뻐들쩍 뻐들쩍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서로 반대편을 향해 걸었다. 해가 자취를 감춤에 따라 날은 조금 더 차가워졌다. 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멈춰섰다. 뒤돌아보자, 조금 길쭉한 온점이, 작고 노란 등이 보였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첫 자음을 길게 눌렀다. 삐이이익- 소리를 내며 글자가 점멸한다.


    [나는 8월 19일.]

    확인.


    [메시지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뻐근하게 굳었던 가슴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더니 이내 뜨끈해진다. 나는 진공처럼 웃던 그에게 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소리 없이 비죽 웃었다.




    * * * * *




    미루는 일 없이 다음 주에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번호를 주고 받은 후 종종 문자를 했지만 늘 내가 먼저 보내면 답장이 오는 식이었다. 그래서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온 그가 먼저 진아,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왔을때는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나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형.


    집은 간단한 구조로, 침대와 책상이 들어가면 꽉 차는 방이 둘, 그리고 부엌 겸 거실과 화장실이 전부였다. 거실 역시 좁았지만 커다란 창이 있어서 답답하지 않았고, TV와 테이블, 온풍기, 2인용 쇼파가 가구의 전부였다. 테이블 위에는 몇 권의 책과 필기도구가 놓여있었다.


    "TV랑 온풍기는 거실에만 있어. 집에 있을 땐 주로 여기 나와 있고. 같이 쓰는 곳이니까 테이블 같은 건 껄끄러우면 내 방으로 들여갈게."

    "아니에요. 나도 여기서 있지 뭐."


    그는 그럼 그럴래?라고 대답한 뒤 앞으로 내가 쓰게 될 방을 안내해 주었다. 방에는 이미 침대가 들어가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는 작게 웃으면서 자신이 집을 구할 때부터 있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쓰라고 답해주었다.


    "그럼 짐부터 간단히 풀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난 거실에 있을게."


    그가 현관에 놓았던 짐을 방으로 들여주며 말했다. 손잡이를 잡는 그의 작은 손, 천천히 움직이는 문, 문 틈으로 보이는 그의 등,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 …문은 왜 닫는거지?

    짐은 가방 두 개가 전부였지만 죽 늘어놓으니 양이 꽤 됐다. 옷가지는 잘 개켜서 책상위에 쌓아두고, 기타 자잘한 것들은 일단 가방에 뒀다. 침대 머리맡에도 거실처럼 큰 창문이 달려있었다. 활짝 열자 네모진 햇빛이 들어와 시트위에 몸을 뉘였다. 예전에는 해 지면 잠들고 해 뜨면 잠 깼다는데 나도 이젠 태양빛에 깨게 생겼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도 대충 다 풀었고 방안에 가만히 앉아있기도 그래서 거실로 나갔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서 무언가를 뒤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넘나들면서 보는 품이 꽤 진지하다. 인기척을 내자 그가 뒤돌아보며 짐은 다 풀었어? 다감하게 물어왔다. 네. 가까이 다가가 책을 들여다보았다. 일본어다.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웃다가 문득 선배가 생각났다. 그 녀석, 하던 선배의 목소리. 말하는 것도 그렇고 꽤 잘 아는 사이 같았는데.


    "아, 맞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형은 어떻게 알게 된거에요?"

    "응?"

    "나 소개시켜 준 선배요. 난 중학교 때 춤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아, 실은 그 형 춤에 반해서 가입 한거지만. 하하"


    일순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가 곧 무표정해졌다.


    "그냥 고등학교 동창. …별로 친하지는 않았어."


    춤도 추는구나. 작은 중얼거림에 나를 향한 질문인가 싶어 네? 하고 되물었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잠잠해진 거실이 냉랭해서 내처 물었다.


    "그거, 일본어는 대학서 강의 듣는거에요?"

    "아니. 아쿠아리스트 하려면 필요해서."

    "일본어가?"

    "응. 영어랑 일어정도는 할 줄 알아야 돼. 현지 바이어와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되니까."


    예의 그 진공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이야기한다. 긴 문장이었지만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고, 듣기에 좋았다. 조근조근하고, 나긋나긋하고, 물기 있지만 축축하지 않은. 그의 음성. 문자를 수없이 되읽으며 상상했던- 그보다 더 깊고 곧은, 목소리.


    "어어. 그런데 일본어는 왜요?"

    "이쪽은 일본이 더 발달 돼 있거든. 일본에서 2년제 전문대 다니고 거기서 취업하는 쪽이 수월해. 아쿠아리움 숫자도 훨씬 많고. 나는 죽 한국에 있을 생각이지만." 

    "뭐, 특별한 이유 있어요?

    "…아니. 그냥."


    아까 선배에 대해 물었을 때와 같은 느낌의 짧은 침묵.


    "저…깜박하고 칫솔하고 치약 놓고왔는데, 슈퍼에 좀 갔다올게요."

    "아. 그거라면 사놨어. 왠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고보면 침대를 보고 내가 놀랐을때, 그리고 지금. 말 안해도 다 알고 대답 해주는 것, 챙겨주는 게 선배와 꼭 닮았다. …선배랑 무슨 일 있었어요? 하고 물으려는데 또 그가 먼저 입을 연다.


    "아, 그리고 말 놔도 돼."


    네에. 짐을 마저 정리하고 오후에는 학교 가는 길과 동네를 간단히 돌아보았다. 집에서 정류장까지는 전에 비하면 조금 멀었지만 학교는 훨씬 가까웠다. 약간 이른 시간 저녁을 함께 먹고, 집으로 돌아와 그가 준비해 둔 칫솔로 이를 닦았다. 거실에 있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냥 고등학교 동창. …별로 친하지는 않았어]

    못내 잠이 오지 않았다.




    "………아."

    "…진아."

    "진아. 일어나. 벌써 점심 시간이야."

    "음… 헉. 형."

    "그래 그래. 밥 먹어야지?"


    형의 목소리에 번쩍 잠이 깼다. 형의 말대로, 벌써 점심이었다. 밤새 뒤척이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남자와 남자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 그에 반해 ㅡ원인제공자인ㅡ 형은 여전히 단정한 모습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뜬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주춤주춤 형을 따라 거실로 나갔다. 거실 한가운데 식탁 대신 앉은뱅이 상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형과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근데 형, 아쿠아리스트는 어떻게 되요. 아. 말 놓기로 했지. 어떻게 되는거야?"

    "아쿠아리움에서 채용공고가 나오면 면접보고… 붙으면 다니는 거고 떨어지면 마는거지 뭐. 요즘은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는 추세라서, 대학생은 드물다고 볼 수 있지."

    "그럼 형은? 졸업하고 취직할 생각이에…야?"


    아직은 반말이 어색했지만, 형은 처음처럼, 그러니까 토토같은 표정과 눈빛으로, 괜찮으니까 천천히.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난 아직 졸업은 안했지만 자격증이 있으니까. 양식기사랑 스킨스쿠버. 정 안되면 양식이나 하려고."

    "…정말?"

    "정말."


    너도 취직 안되면 내 밑에서 일해. 하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어. 웃었다. 뭐? 형 웃었어 방금. 소리내는 거 처음 봐. 어허. 흔치 않은 기회야.



    그 뒤로, 신입생 OT가 있던 며칠을 제외하고 개강 할때까지 줄곧 집에만 있었다. 물론 가끔 친구를 만나거나 일을 보러 나가기는 했지만 집에 있는 시간에 비하면 극히 적은 비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 있는 것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항상 긴장 상태였다는 편이 옳았다. 방문을 닫을때도 소리 나지 않게 공 들여 닫고,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에도 흠칫흠칫 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은 흘렀고, 대학이란 곳에도 적응이 되었으며, 형과의 관계도 많이 개선되어 물흐르는 듯한 반말은 물론 거센 장난도 칠 수 있게 되었다. 형의 예측하기 힘든 행동이 어려움이자 동시에 매력이었다.


    "형. 나 오늘 수업 없는 척 하고, 형 없을 때 시장봐서 오징어 볶음 해놨다. 나 예쁘지?"

    "………."


    형은 대답없이 앉은뱅이 상 위의 접시를 주시했다. 헉. 설마 안 먹는건가. 역시, 해양생물학도에게 오징어 볶음은 너무 가혹했어.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미안해하고 있는데 대뜸 목소리를 변조해서 묻는다.


    "자네, 오징어를 아나?"

    "응. 지금 먹고 있어."

    "…오징어의 눈은 인간의 눈처럼 색이나 물체를 판별할 수 있도록 발달되있어. 그런데 눈으로 수집한 정보를 처리하는 두뇌는 너무 원시적이야. 김동완의 뇌를 전진의 몸에 올려놓은 격이지."

    "………."

    "오징어는 빠르고,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며 어떤 곳도 가리지 않고 세계 전 해역에 수 십억 마리나 살고 있어.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오징어를 '절대자'에게 정보를 보내주는 '관찰자' 같다고 할 정도야."


    ……왠지 먹기가 꺼림칙해졌다.


    "그것도 책에서 본거야?"

    "아. 뭐. 그렇지.책이랑 비슷해."

    "그래서, 안 먹는거야? 맛있는데."

    " 만화책에서 봤어. 그럼 해양생물학도로서, 잘 먹겠습니다."

    "………."


    단지 한가지 개선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선배와 형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었다. 몇번이나 물어보려고 했지만, 동완형은 항상 그랬던 것 처럼, 그리고 또 선배처럼- 앞서서 질문조차 막아버리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김동완을 좋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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